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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03 14:42:55
제 목  무궁화를 바로알자
글쓴사람  임재선 조 회 수  1907
내 용


< 무궁화를 바로 알자 - Ⅱ >


일제는 우리의 민족의식과 저항을 잠재우고 전쟁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조선말과 한글 사용금지, 창씨개명 강요, 그리고 무궁화를 모두 없애고 벚꽃으로 바꾸어 심는 것 등의 식민지 정책을 사용하였다.

이중 무궁화의 뼈아픈 수난은 일제치하인 1933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일제는 전국에 있는 무궁화를 뽑는 것은 물론, 무궁화를 보고 있거나 만지면 눈병이 나고 부스럼이 난다는 등 갖은 악소문을 퍼뜨려 무궁화를 멀리하도록 했다. 또한 무궁화는 꽃이 지저분하고 벌레가 많이 꾀는 나무라고 선전했다.

이러한 무궁화에 대한 탄압과 함께 행해진 것이 바로 일본 국화인 벚꽃 심기다. 벚꽃으로 유명한 도시 진해는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항으로 개발한 ‘비운의’ 도시다. 일본에서 상륙하기에 가장 편리한 도시 중의 하나가 바로 진해이기 때문이다.

1906년경, 대륙침략 전진기지 진해를 군항으로 개발하기 위해 진해와 마산 지방에 들어온 일본인들이 심기 시작한 벚꽃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진해군항제’로 남아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도시 계획 측량을 실시하고 2만 그루 이상의 벚나무를 진해로 옮겼다. 한마디로 진해는 ‘계획적인 벚꽃의 도시’인 셈이다. 충무공을 기린다는 군항축제가 흩날리는 벚꽃 앞에서 열리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현재 벚꽃은 제주도가 원산지인 왕벚꽃나무로서 일본의 것이 아니다”라며 지나친 정치적 해석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이 옮겨 심은 벚꽃은 해방 후 한때 이승만 정권이 베어냈다. 그 후 박정희 군사정권이 관광도시개발을 위해 복원한 것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제주도산 왕벚꽃나무이다.

그러나 벚꽃으로 도배된 한국의 4월, 문제는 식물학적인 원산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의 측면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본이 역사왜곡과 독도망언을 서슴치 않으며 군국주의로의 부활을 꿈꾸는 가운데 올해도 반도를 뒤덮은 벚꽃. 벚꽃이 화사하게 핀 바로 그 자리 100년 전에는 무궁화가 피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벚꽃은 봄만 되면 관공서며 길거리며 공원이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어디든 어김없이 숲을 이루듯 화려하고 아름답게 피어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함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왠지 슬픈 마음이 든다.

무궁화 동산, 무궁화 축제는 없고, 벚꽃 동산, 벚꽃 축제만 있는 우리 사회에 무궁화 동산, 무궁화 놀이를 무궁화 축제로 승화시켜 자리매김해온 고장이 있다. 바로 강원도 홍천이다.

홍천군은 평생을 나라사랑과 독립운동에 바친 한서 남궁 억 선생(1863-1939)이 1918년 홍천군 서면 보리울(모곡)에 낙향, 무궁화를 통한 민족의 광복에 대한 의지를 승화시켰던 고장이다.

홍천군은 이러한 남궁 억 선생의 고귀한 민족사랑에 대한 얼을 기리며 나라사랑 정신을 군민정신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무궁화동산을 건립하고 매년 한서문화제를 개최하는 등 각종 문화의식을 마련하는 가운데 차츰 무궁화의 고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무궁화를 널리 보급한 한서 남궁 억을 기념한 공원 안에 그의 시비와 군민헌장기념비, 3 &#8226; 1만세 탑, 한국전쟁 홍천지구 전투 전적비, 반공희생자위령탑 등을 세워 추모행사와 더불어 총체적으로 무궁화 축제를 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민족혼을 나타내는 무궁화의 이미지를 홍천군의 이미지에 고취시키기 위해 무궁화 거리를 조성했고, 무궁화 생태관광과 무궁화 캐릭터사업도 활성화시켜 무궁화 운동의 본고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나는 독립을 못 보아도 너희는 볼 것이다. 몸은 과일나무 아래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

홍천군 서면 보리울 마을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무궁화 묘목을 보급하며 나라사랑으로 한 평생을 바친 한서 남궁 억 선생.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오늘날까지 무궁화를 얘기할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다.

한서翰西 남궁 억의 무궁화에 대한 사랑은 유별났다. 1863년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 1884년 아무도 영어를 배우려 들지 않았던 시절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어전통역관이 되어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남궁 억은 대표적인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후 독립협회에도 가입하여 개혁운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남궁 억으로서는 일종의 외도였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독립신문을 편집한 경험을 살려서 황성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1902년 일본이 러시아와 한반도 분할안을 토의하는 것을 폭로하여 일제의 침략야욕을 백일하에 폭로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심한 고문을 받아 병약한 몸이 되었고 황성신문 사장직마저 사임하게 된다.

그 후 1910년부터는 배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여성교육의 일선에 나서며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길러주기 위하여 우리나라 지도에 무궁화를 수놓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선생은 교단을 떠나 낯선 고향 강원도 홍천으로 가야만 했다. 이 낙향의 길에는 남궁 억 생애 최후의 도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은 1919년 9월 홍천 보리울에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무궁화 묘포장苗圃場을 만들어 무궁화를 심고 가꾸어 7만이나 되는 많은 무궁화 묘목을 나누어 주면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외로운 민족운동을 일제가 탐지하게 되어 끝을 맺게 되었으니 1933년 ‘무궁화사건’이 그것이었다. 일제가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하여 그들의 일장기와 벚꽃을 보급하고 장려하려는 것에 항거해 당시 모곡리의 감리교 전도사로 일하던 남궁 억은 ‘무궁화 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고 무궁화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에 분개하여 무궁화 묘목 7만 주를 불태우고, 이들을 구속하고 학교는 공립학교로 강제 편입시켜버렸다.

모진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고 병이 든 선생은 그 여독으로 1939년 77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후손들은 한서 남궁 억 선생을 2000년 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했고, 그의 무궁화 정신은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남아 우리의 민족사와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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